내 삶의 속도를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되는 이유
- Jihye Choi
- 19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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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속도에 따라 기쁨과 절망이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인다면, 한 번쯤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그 비교가 지금 당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 글은 비교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하나씩 해체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묻혀 있던 것들을 어떻게 다시 자기 생명의 힘으로 회수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외부의 속도에 더 취약한지부터 살펴보자.
01 다음 세 가지 성향 중 하나라도 강하다면, 당신은 자기 삶의 시간표보다 외부의 리듬에 더 쉽게 동조하게 된다
첫 번째,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 — 불확실성 민감형
불확실한 것은 언제나 불안을 일으킨다. 당신은 불안도를 낮추기 위해 모든 것들을 최대한 확실하게 만든다. 사회적 통념, 속도, 평균적 경로, 즉 외적 기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안전을 얻는다. 대신 당신은 그 확실한 기준점의 노예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서 점점 분리된다. 즉, 불안을 없애기 위한 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내적 분리불안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경우 — 관계 민감형
표면적으로는 조화와 평화를 외치지만 실질적인 이면은 관계와 집단 안에서 내 자리를 확보하려는 욕망이 잠식되어 있다.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속도와 분위기, 그리고 대세의 흐름에 나를 맞춰야 한다. 나는 집단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어야 한다. 그러한 동기는 언제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마지막, 나만의 색깔대로 살고 싶은 당신 — 자유 지향형
나만의 색대로 살겠다는 말은 정해진 궤도 즉 시스템의 경로를 쫓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대세와 다른 길을 마주하려는 용기, 대다수와 다르다는 외로움과 불안감, 보장해주지 않는 결과,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만한 내적 그릇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만한 깊이와 넓이의 자유로움을 정서적으로 담아낼 내적 공간이 없다면 타인의 속도를 참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위의 세 가지 성향 중에 당신에게 해당되는 부분이 있는가.
다음은 개인의 성향을 부추기는 현재의 사회, 경제학적 문화적 환경을 살펴보자.
02 환경적인 요인 — 왜 지금 시대에 그 취약성이 더 쉽게 활성화되는가
타인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어 사는 것 자체가 언제나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는 과연 정상적인가? 이렇게 질문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주도하는 방식과 속도, 즉 내가 옳다고 느끼는 삶을 온전히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내가 원하는 대로'라는 게 유아적인 자기 방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신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성장하고 자신과 연결됨을 바탕으로 타인과 세상과 연결되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하지만 나만의 방식이라는 것은 보통 명명하기 어렵고, 과정의 모호함과 복잡함, 그리고 덜 선명한 그 모든 느림을 포함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 느리고 불분명한 시간을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과 연결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과정들을 어떤 환상이나 이미지가 아닌 내 몸으로 직접 겪고 알아가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환경은 이런 과정을 견디고 통과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경제적 질서는 기다림보다는 즉시성, 숙성보다는 가시적 결과, 과정보다는 성과, 탐색보다는 확정, 깊이 보다는 속도를 우선시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배우는 것은 하나다.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서 미래의 나를 더 빨리 당겨올 수 있는 방법이다. 즉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수단만 있다면 최대한 그 수단을 활용해 재빨리 결과를 얻어내야만 한다. 하나하나의 과정을 견디고 탐색하고 확정하고 천천히 형성되는 자는 멍청하거나 미련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화폐의 가치에서 성공한다면 그 사람은 영웅이고 한 분야의 장인으로 기억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늘 같은 질문 안에서 살아간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과정을 최소화한 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바로 그 질문이 지금의 문명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멈춰 서서 생각해 보자.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얻고 있고 또 무엇을 잃고 있는가. 혹시 나 자신과 타인이 계속적으로 분리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을 단축하려는 방식은 늘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타인의 것을 훔치고, 속이고, 증상만 제거하고, 압축하고, 생략하는 것이다. 다이어트 약, 미용 시술, 빠른 성공 공식, 불안 해소법, 손쉬운 치유, 즉각적 깨달음,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충동 위에 놓여 있다. 시간을 견디기보다 시간을 줄이고 싶어 하는 충동.
문제는 이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삶이라는 현장에 놓여 있고, 그 현장을 건너뛴 채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본래 과정의 연속이다. 그 과정을 제거해 버리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삶을 제거하려는 충동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리거나 미치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대가를 이미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눈에 띄게 알려주는 내면의 신호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신호들을 따라가 보자.
03 당신이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면의 감정들
우리는 의식적으로 마주하기 힘든 감정들을 무의식이라는 창고에 가둬둔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 특히 나 자신이 — 일사천리로 단숨에 이루어진다. 가장 밑바닥에는 나 자신을 부족하게 느끼는 수치심. 그 수치심이 오랜 시간을 버티면 그 위에 무력감이 쌓이고 그 둘을 짊어지고 긴 시간이 켜켜이 퇴적되면 마침내 그 감정들 위에 분노가 쌓인다. 수치심. 무력감. 분노. 이러한 감정들은 "감히"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들이다. 수치심은 어떤 한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드리는 감정이다. 내 존재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느낌.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내가 공격적이고 이기적이고 관계를 깨는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분노. 당신의 의식은 이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게 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밑바닥의 감정들은 교묘하게 다른 얼굴들을 하고 표면으로 나타난다. 수치심은 불안감과 전전긍긍하는 긴장감으로. 무력감은 내 안의 감당할 힘이 없다기보다는 무언가 외부에서 자꾸 나를 누르고 몰아붙이는 압박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분노는 왜곡된 형태로 몸과 신경계에 고스란히 남아 표현되지 못한 채 계속적인 긴장으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들이 몸 안에 남아 있을 때 관계 안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04 관계 안에서 투사의 광란
감정이 흘러가지 못하고 몸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경우 — 당신은 모르겠지만 — 이제 당신의 삶에서 투사의 광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내 정체성과 자존감을 위협하는 감정들, 즉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미해결된 감정들은 타인이라는 스크린을 통해서 비춰지기 시작한다. 그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타인의 빠른 속도, 안정된 관계, 분명한 사회적 자리, 확신 있어 보이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이 이제 슬금슬금 저 밑바닥에 잠식되어 있는 당신의 수치심, 무력감, 분노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어떤 특정한 성격의 대상들이 자꾸 반복해서 당신을 거슬리게 한다면 그건 백이면 백 투사의 광란의 현장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당신. 불안한 당신. 그걸 자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일관되지 않은 태도를 가진 타인이다. 상대의 마음이 확실히 읽히지 않을 때. 상대의 의도가 분명치 않을 때. 타인의 모호함은 당신의 통제 욕구를 건드린다.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그 사람 때문에 불안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보가 불분명하고 부족할 때 결국 자기 자신이 가진 감정 구조로 상대를 해석하게 된 것뿐이다.
관계 안에서 자신의 가치와 자리를 확인받고 싶은 당신. 인정의 온도에 민감한 당신.
대개 차갑고 평가적이며 공감이 없는 즉 약간 건조하거나 무심한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혹은 "나를 안 좋아하나?" 이런 생각이 반복적으로 든다면 당신 내면의 숨겨진 감정들이 활성화되는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의 표정이 닫혀 있을 때. 따뜻한 기색이 돌아오지 않을 때. 타인의 무심함은 당신 안의 수치심과 분노를 깨운다. 그 사람이 차가워서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당신에게 관계는 내 가치와 자리가 확인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성취, 결정, 속도 앞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자기 삶의 리듬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당신. 자꾸만 비교의 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당신. 그 불안을 자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빠르고 확신에 찬 타인이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본다기보다는 그걸 계기로 당신 안에 이미 오래된 정동(affect)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 불편한 감정들이 시사하는 메시지는 사실, 그러한 타인 앞에서 깨어나는 자신의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들에게서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05 해방 — 자유로워지기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받아들일수록 마음은 평안을 되찾는다. 마음의 불안은 언제나 저항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지금-여기로 돌아와 숨 쉬고 편안해진다. 이건 하나의 삶의 법칙 같은 것이다. 삶에서 어떤 괴로움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싶다면 결국 필요한 것은 방향을 돌려 받아들이는 일이다. 문제가 없다고 믿고 싶겠지만 있는 걸 없다고 하는 건 합리화이거나 환상의 세계로 도망치려는 작전일 뿐이다.
첫 번째, 수치심.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층의 감정. 수치심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가 결함 없는 완벽한 존재로 살아야만 안전하다고 믿는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다. 때로는 어색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서투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 아무리 누군가가 뭐라고 하든 인간 존재로써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실수하고 서툴다고 해서 우리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부끄러운 게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존재의 결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제 자신을 수용하게 되고 존재적으로 안정감을 되찾고 그러다 보면 살다가 어떤 일이 생겨도 회복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생긴다. 타인의 한마디 혹은 거절이나 평가, 무거운 분위기에 흔들리거나 압도되지 않고 이제 자기중심을 지키기 시작한다.
두 번째, 무력감.
무력감은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내가 아무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그런 밑바닥의 감정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자기 안에 무력감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일상적으로 잘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은 무력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감정은 대부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압박감이나 불안감, 혹은 초조함의 형태로 표면에 올라온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견디기 어려운 무력감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속도와 성취 앞에서 이유 없이 압박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현대인은 겉으로는 잘 기능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무력감과 고립감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자발성(spontaneity)을 잃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람은 더 불안해지고 더 쉽게 외부의 속도와 기준에 휘둘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무력감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주저앉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도 없다. 내가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그때부터 사람은 자기 리듬을 갖게 되고, 더 겸손해지며, 한계를 아는 지혜 속에서 오히려 안정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분노.
억눌린 분노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자기 자신이 착하고 도덕적이고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가 강할수록 말이다. 사실 건강한 분노의 감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나에게 경계를 알려주는 신호 같은 거다. 내 바운더리를 알려주는 고마운 감정의 신호 같은 것. 내가 동의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참는 게 아니라, 더 진실되고 성숙한 관계를 위해서 자신의 경계를 지켜주는 행위를 하는 거다. 자기 존중은 자신 안의 분노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이다. 경계가 생긴다는 말은 주체성이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숨겨진 감정은 당신을 본래의 자신에게 데려간다. 반쪽짜리 자아가 아니라, 빛과 그림자가 함께 통합된 온전한 존재로. 감춰져 있던 것이 빛으로 드러나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하나의 별처럼 스스로의 중심을 갖게 된다. 그때부터 타인은 더 이상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은 삶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해주는 유일한 선물이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